조선 25대 왕 철종: 왕위 즉위와 정치적 고난의 시대

조선 25대 왕 철종: 왕위 즉위와 정치적 고난의 시대

철종, 조선왕조의 제 25대 왕으로서, 그의 통치는 1849년부터 186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나타내며, 철종의 정치적 도전은 그의 통치기간을 정의하는 중대한 요소였습니다. 철종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종의 어린 시절: 유배의 그림자

철종은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증손자입니다. 즉,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의 동생의 손자 중 한 명입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일가들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며 정조를 음해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조를 폐위시키려 시도했던 무리들은 자결하거나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되었던 무리 중 은원군의 손자인 원범은 살아 남았고 이후 철종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철종의 유배와 왕위 계승

철종의 초기 생애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44년, 현자왕후 김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 어린 왕자의 생애는 유배지에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철종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사건으로, 유배 중에도 헌종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습니다. 1849년, 철종은 궁으로 돌아와 헌종을 뒤이어 어린 나이인 10대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실로 권력 없는 왕으로서의 재임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난관에 직면한 허수아비 임금 철종

철종의 즉위는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도전적인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순조 때부터 이어진 안동김씨 친족의 권력은 왕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들은 안동 김씨 일가의 딸을 왕비로 맞으면서 점차 안동 김씨의 세력은 누구도 겉잡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안동김씨의 정권 장악

지배적인 외가 세력인 안동 김씨는 철종 재위 기간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단순히 가족관계에 그치지 않고 조선정치의 핵심으로 깊숙이 퍼져 나갔고 씨족의 권력은 왕실과 궁중 정권을 독점하였습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철종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세도 정권은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철종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않고, 나라를 돌보지 않아 백성을 지켜내지 못하였고, 술과 궁녀들과 가까이하며 건강하지 못한 말년을 보내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삼정 문란

조선시대 삼정의 문란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철종시대입니다. 삼정은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세 가지 세금 체계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철종 시대에는 이 삼정이 심각하게 문란해져 농민들의 극심한 곤궁과 사회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1. 전정: 농민 수탈의 온상

전정은 농민들의 밭에서 거두어들이는 토지세와 조세를 말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토지 소유 현황 변화와 측량 부실, 면세전 증가 등으로 인해 전정 체계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 토지 소유 현황 변화: 양반과 토호들의 토지 소유가 확대되면서 면세전이 증가하고 실제로 세금을 내는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 측량 부실: 정확한 토지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토지가 누락되거나 부정 신고되어 세금 수입이 감소했습니다.
  • 면세전 증가: 권력층과 부유층은 면세 특권을 누리면서 세금 부담을 피해갔고, 이는 일반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키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전정은 농민들에게 막대한 부담을 주는 수탈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2. 군정: 군사력 약화와 백성 착취

군정은 국가 방위를 위한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군포와 노역을 징수하는 체계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군정 시스템의 문란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 군포 징수 부실: 군포 징수 시스템이 문란해져 실제로 군대에 사용되는 군포는 감소하고, 징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으로 백성들은 착취당했습니다.
  • 노역 착취: 군사 훈련과 관련된 노역 징수가 부당하게 이루어져 백성들의 삶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 무능한 군대: 군정 문란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어 외세 침략에 취약해지고, 백성들의 안전도 위협받았습니다.

3. 환정: 농민 착취와 국가 재정 악화

환정은 흉년에 대비하여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환곡 시스템의 부정 운영으로 농민들이 착취당하고 국가 재정도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 곡식 대출 부실: 곡식 대출 과정에서 부정이 만연하여 농민들은 실제로 필요한 곡식을 받지 못하고, 부당하게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습니다.
  • 환곡 모조: 환곡 시스템을 악용하여 곡식을 빼돌리는 모조 행위가 만연하여 국가 재정에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 농민 착취: 환정 시스템의 부정 운영으로 농민들은 빚에 쪼들리고 토지를 빼앗기는 등 극심한 곤궁에 처했습니다.

철종 시대에는 삼정 문란이 더욱 심각해져 농민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이는 1862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이어졌고,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백성들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동학사상의 출현과 영향

동학의 유래

최제우의 가르침에서 출발한 동학사상은 조선 사회의 기존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등장했습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봉기하던 시기, 외국 이양선과 천주교의 유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사상입니다.

동학은 천주교에 대응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이며 창시자 최제우, 2대교주 최시형, 3대 교주 손병희를 거치며 천도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최제우의 동학 사상은 양반의 확고한 특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백성들에게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동학의 확산

동학사상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급속히 울려 퍼졌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투쟁과 열망에 대한 목소리를 찾았고, 이러한 지지의 물결은 특히 종교적 표현의 영역에서 더 넓은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변화했습니다. 양반 계층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는 동학의 승승장구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촉발한 심오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는 집단적 정서의 잠재력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사회의 사회적 역할을 진화시키고 재정의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민중의 힘으로 조정 대신들을 몰아내었듯 현재 2020년대를 살고 있는 국민들도 한 번쯤 되새겨보아야할 사상으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의 확산

철종 시대에 동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발전은 천주교의 확장이었습니다. 가톨릭교가 ​​특히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종교적, 철학적 사고가 다양해진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보편적 평등의 교리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의 매력은 부분적으로 보편적 평등을 옹호하는 교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종교 철학은 사회 계층 구조와 귀족의 특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모든 개인에 대한 평등한 대우에 대한 급진적인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사회 계층 전반에 미치는 영향

가톨릭교는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여 귀족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접근 가능한 교리와 관습은 대중의 폭넓은 참여를 촉진하여 조선 사회의 종교 관습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천주교의 영향력은 철종 시대를 넘어 이후 고종과 순종의 통치를 거쳐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혼기까지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습니다.

 

결론

철종은 조선왕조 제 25대 왕으로서, 그의 통치 시기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나타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정치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세도정치와 민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철종의 통치 시대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시대로 남았으며, 그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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